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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미디어연구

[바람아 멈추어다오] 작업노트

biyo 2018. 6. 17. 07:21


​- 영상 [00:03:12:00]



오랜만에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간단히 씻고 나와 집 근처에 있는 서강대교 위를 걸었다. 아침부터 햇볕은 따뜻했고 강물은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다. 서강대교 끝을 찍고 다시 되돌아 가는 길에 ‘다리의 다리’인 교각(橋脚) 에 물 그림자가 그물망 같은 무늬를 만들어 내며 위 아래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물 그림자가 개구쟁이처럼 눈웃음을 지으면서 장난스럽게 단단한 철근 콘크리트 교각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 난간에 팔을 포개고 기대어 서서 일렁이는 물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보니 머릿속에 ‘교각도 아무렇지 않은 체 하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죽음의 관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죽음은 필연적이기에 인간에게 무섭고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인간은 웃고 울고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뒹굴고 뒤 섞이며 삶을 살아가는 순간엔 비로소, 자신을 누르고 있는 죽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필연적으로 닥칠 죽음이라는 존재를 잠시 동안 잊을 수 있다. 그런 순간들이 바로 물 그림자처럼 ‘죽음’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간지럽히는 것이다.

엄마의 손은 멈춘 적이 없다. 움직이는 그 손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을 간지럽히는 물 그림자가 그 위에 오버랩 되어 진하게 일렁인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엄마의 손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커다란 손이었고, 부업을 본업으로 하는 작업장을 만든 이후론 많은 동네 이모들의 생계 또한 엄마의 커다란 손에 달려 있게 되었다. 이 작업장엔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 여러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다. 신장이 망가져 매일 3번씩 스스로 투석을 해야 해서 본업을 갖지 못하는 두 딸의 엄마, 돈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한국 남자와 결혼해 10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태국인 이모, 그리고 갱년기를 심하게 겪어 약간의 정신 분열이 오게 된 할머니까지. ‘삶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은 다시 없다’라고 했던 소설가 양귀자의 말을 증명이나 하듯 정말 다양한 삶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여성들은 작업장에 삼삼오오 모여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위해 노동을 한다.

엄마의 작업장은 분명 일을 하고 돈을 받는 ‘노동 현장’이다. 하지만 기업처럼 상명하복의 수직적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심때가 되면 같이 밥을 지어먹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라디오를 들으며, 계속해서 서로 웃고 떠드는 ‘공동체’에 가깝다. 그러나 이 이상한 노동 공동체는 노동자에게 최저 시급을 보장하지 못한다. 공장으로부터 개당 10원도 체 안되는 금액을 받는 단순 작업을 하기에 하루 종일 바쁘게 손을 움직여도 일당 5만원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 아침 10시면 이 작업장에 모인다. 그리고 턱없이 적은 돈과 진하게 일렁이는 물 그림자를 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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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디어연구 수업에서 과제로 작업했던 영상작업 [바람아 멈추어다오] 의 작업노트에서 가져왔다. 첫부분은 이 블로그에 예전에 올렸던 ‘8월의 크리스마스’ 에서 가져와서 다듬었는데 이 부분이 작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수직적이고 남성적인 콘크리트 교각에 여성적인 물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여주는 대비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연히 형성된 ‘여성 노동 공동체’ 의 모습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다. 작업을 하며 내가 가진 생각이 화면에 그려져 눈 앞에 보이는게 무척 즐겁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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