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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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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biyo 2018. 11. 15.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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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심한 우울증의 고통은 그 병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울증이 많은 경우 자살로 마감되는 것은 그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본질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이 있어야만 이로 인한 무수히 많은 또다른 자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 많은 경우 의학적인 치료나 입원을 통해 - 대다수 사람들은 우울증을 극복한다. 이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말기 암의 희생자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41page


   중증의 우울증 상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자아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2의 자아는 일종의 유령 같은 관찰자로서, 본래 자아가 경험하는 치매 상태가 전혀 없는 냉정한 호기심을 갖고, 그가 다가오는 재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지를 관찰한다.

   이 모든 행위에는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그후 며칠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소멸을 준비해나갔다. 그런 상황이 멜로드라마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 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이었다. 나는 아직 어떤 방법으로 세상과 이별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단계가 다가오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조만간, 마치 다가오는 저녁을 피할 수 없듯이 필연적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을.


-78page


   우울증의 어두운 숲에 거주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고뇌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심연으로부터의 귀환은 시인의 비상과 다르지 않다. 깊이 모를 지옥의 심연에서 위로 위로 힘겹게 걸어 올라와 마침내 '눈부신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건강이 회복된다면 평정과 기쁨을 즐길 수 있는 능력 또한 회복한다. 이것이야말로 절망을 넘어선 절망을 견딘 자들에게 돌아가는 충분한 보상이리라.

   E quindi uscimmo a riveder le stelle.

   그래서 우리 빠져나왔도다, 다시 한번 별을 보게 되었노라.


-102page


최근 과제 때문에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읽었다. 레포트를 쓰면서 작가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그가 말년에 우울증을 겪으며 썼다는 짧은 에세이 <보이는 어둠>을 읽고 싶어졌다. 다행히 학교 도서관에 있어서 과제를 하다 말고 이 회고록을 빌려와 읽었다. 당연히 문학 코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사회과학 코너 우울증에 대한 신경정신과 권위자들의 두툼한 책들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끼워져 있어서 낯설었다. 이 에세이를 읽으니 왜 <소피의 선택>의 '스팅고'라는 캐릭터가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남이 볼 것이라는 걸 알고 쓴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흠 



우울증의 또다른 특징은 자아가 원래의 '나'와 그런 나를 지켜보는 객관화된 제2의 '나'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우울증은 멜로드라마처럼 자신을 무대화하여 보여준다. 고통받고 있는 피학적인 '나'를 지켜보는 가학적인 '나'가 있다. 이처럼 우울증의 공연무대에서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 고독한 배우이자 외로운 관객"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집증과 우울증 사이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스타이런의 고통을 읽으면서 위안을 느꼈다. 어느 날 꼬마가 뜬금 없이 엄마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잘 죽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죽음의 공포에 늘상 사로잡혀 사는 꼬마는 엄마의 무분별하고 무심한 대답에 상처받고 울었다. 그래서 어린 우울과 늙은 우울이 등을 기대고 앉아서 위안을 나눴다. 잘 죽는다는 말은 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것이라고 나는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임옥희, 역자 후기 중



윌리엄 스타이런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아니라 2006년 11월 1일 폐렴으로 인해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그는 우울의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와 '눈부신 세상' 속에서 살게 된 걸까? 여든하나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는 몇 번이나 어둠에서 '위로 위로 힘겹게 걸어 올라와 마침내' 다시 별을 보기를 반복했을까? 부디 그가 별빛 아래에서 잠들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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